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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펜하이머> _ 리뷰

by 소소한쎈언니 2025. 5. 31.

이번 글에서는 <오펜하이머>에  인간의 내면, 놀란감독의 가장 '조용하고 위대한영화', 영웅에 대해 리뷰해 보겠습니다.

오펜하이머 포스터
영화 오펜하이머(출처: 네이버영화 포스터)

전쟁보다 더 무서운 건 인간의 내면이었습니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난 후, 한동안 쉽게 자리를 뜰 수 없었습니다. 단순한 전기 영화나 역사 영화라고 생각하고 봤다면 아마도 그 깊이에 놀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원자폭탄을 만든 과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삶을 다룬 작품이지만, 그보다 더 깊은 주제들을 담고 있는 영화였습니다. 과학, 전쟁, 정치, 윤리, 그리고 인간의 불안정한 내면까지요.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계속해서 “이건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과학자들이 모여 핵무기를 만드는 과정이 흥미로웠습니다. 물리학 이론이 실험으로, 실험이 곧 무기가 되는 장면들은 긴장감 넘치고 밀도 있게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원자폭탄의 탄생 비화를 담는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통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인간이 신의 영역에 다가갔을 때 겪는 혼란’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영화의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폭탄 실험이 성공한 후, 오펜하이머가 회의장에서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면서도 동시에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며 저는 ‘과연 성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렸습니다. 기술적 성취가 반드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을 영화는 냉정하게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오펜하이머가 폭탄을 만들고 난 뒤 점점 죄책감과 후회, 그리고 정치적 탄압 속에서 무너져 가는 모습은 전쟁보다 더 처절하게 느껴졌습니다. 핵폭탄이 세상을 바꿨지만, 오펜하이머는 그 대가로 스스로를 파괴당한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핵이 아닌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놀란 감독의 가장 '조용하고도 거대한' 영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하면 대체로 ‘시간’, ‘과학’, ‘스펙터클’ 같은 단어들이 떠오릅니다. <인셉션>, <인터스텔라>, <테넷> 같은 영화들은 복잡한 구조와 화려한 장면들로 유명하지요. 그래서 <오펜하이머>가 개봉된다고 했을 때, 저는 이 영화도 시공간을 넘나드는 거대한 서사가 펼쳐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의외였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놀란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 훨씬 정적인 영화입니다. 폭발 장면은 단 한 번이고, 대부분은 인물 간의 대화, 회상, 그리고 법정 심문 같은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오히려 더 긴장감 넘치고 몰입감 있게 다가왔습니다. 이야기는 세 가지 시간 축을 오가며 진행됩니다. 하나는 오펜하이머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하던 시절, 또 하나는 정치적 음모로 인해 그가 청문회에서 몰락해가는 시점, 그리고 마지막은 오펜하이머의 라이벌인 스트로스가 상원 인준을 받기 위해 청문회에 서는 장면입니다. 이 세 시간축이 교차하면서 서사가 흘러가는데, 놀란 특유의 편집 기법과 음악 덕분에 하나의 거대한 퍼즐처럼 느껴졌습니다. 영화의 음악은 루드비히 요란손이 맡았는데, 그 전자음악 같은 음향들이 영화의 불안하고 긴장된 분위기를 잘 이끌어줬습니다. 특히 오펜하이머가 죄책감에 시달릴 때마다 반복되는 음의 진동은 마치 그의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죄의식을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놀란 감독이 특수효과를 최소화하고, 대부분 실제 세트와 필름 촬영으로 진행했다는 점도 인상 깊었습니다. 원자폭탄의 폭발 장면조차 CG가 아닌 실제 촬영 기법으로 구현했다고 하는데, 그렇기에 그 장면이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시각적인 자극보다 인물의 심리에 집중한 영화였고, 그런 점에서 놀란 감독의 작품 중 가장 성숙한 영화가 아닐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오펜하이머가 과연 영웅인지, 아니면 또 다른 종류의 괴물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는 분명 뛰어난 과학자였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요한 악’을 감수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너무 늦게 깨달은 사람이고, 그로 인해 괴로워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오펜하이머를 한쪽으로 규정짓지 않습니다. 그는 나르시시즘이 강한 인물이고, 자신의 지적 능력을 자부하면서도 쉽게 흔들립니다. 그리고 정치적 현실 앞에서는 쉽게 무너지기도 하고요. 그가 옳은 선택을 했는지,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영화는 그런 판단을 관객에게 넘기고,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의 모순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대사는 아인슈타인과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세상은 변했고, 사람들은 그 변화를 당신 때문이라고 기억할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당신을 잊을 겁니다.”라는 말이었죠. 그 말은 굉장히 차가웠지만, 동시에 현실을 정확히 말해주는 대사라고 느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세상을 바꾼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변화는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 것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 자신조차도 파괴해버렸습니다. 그가 평생을 걸고 이룬 과학적 성취가 결국 인간을 더 윤리적으로 만들었는지, 아니면 더 파괴적인 존재로 만들었는지는 여전히 논쟁거리입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저는 결국 <오펜하이머>가 전쟁 영화도, 과학 영화도 아닌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영화는 묻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했지만, 그것이 정말 해야만 했던 일이었을까?” 그 질문은 단지 과거의 과학자들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었습니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굉장히 묵직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남기는 작품이었습니다. 일반적인 블록버스터처럼 쉽고 단순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보는 내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역사, 윤리, 과학, 정치, 인간성까지 다층적으로 다룬 영화였고, 관객으로서 그 질문들을 함께 고민해볼 수 있어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조금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이런 주제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반드시 한 번쯤은 볼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엔딩 장면에서 눈빛 하나로 모든 감정을 표현한 킬리언 머피의 연기도 정말 훌륭했습니다. 긴 영화였지만, 저는 그 길이가 아깝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