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소리 없이, 혹은 아주 조용한 속삭임으로 우리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려 잔잔하지만 묵직한 감동을 선사하는 영화. 저에게 2021년에 개봉한 션 헤이더 감독의 영화 <코다>(CODA)가 바로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2022년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각색상, 남우조연상 등 3관왕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이 영화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가 컸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다 보고 나왔을 때, 제 마음속은 몽글몽글한 따뜻함과 함께 오래도록 잔잔한 감동이 밀려와 한동안 자리를 뜰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접했을 때, '청각장애인 가족 속에서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소녀의 이야기'라는 줄거리만 보고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성장 드라마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코다》는 단순한 성장 드라마를 넘어, 소리와 침묵, 가족과 꿈, 그리고 사회적 편견과 장애를 뛰어넘는 용기와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들을 진솔하게 이야기하며 제게 진심으로 울림을 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영화가 왜 그렇게 오랫동안 제 마음속에 남아있는지, 그리고 《코다》가 우리에게 '진정한 들음'의 의미와 '사랑의 언어'를 어떻게 일깨워주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조용한 세상 속, 노래하고 싶은 소녀: 루비의 선택과 성장통
영화의 제목인 ‘CODA’는 ‘Children of Deaf Adults’의 약자로, 즉 청각장애인 부모를 둔 자녀들을 의미합니다. 주인공 루비(에밀리아 존스)는 코다이자, 매사추세츠주 글로스터의 작은 어촌 마을에서 가족들과 함께 어업에 종사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입니다. 루비의 아버지(프랭크)와 어머니(재키), 그리고 오빠(레오)는 모두 청각장애인이고, 루비는 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가족입니다.
그래서 루비는 어릴 적부터 가족과 세상 사이를 연결해주는 통역사 역할을 하며 살아갑니다. 학교 수업과 친구 관계보다도 바다에서 아버지를 도와 어업에 종사하는 것이 더 익숙하고, 가족들과 식사할 때나 대화할 때는 소리보다 미국 수화(ASL)라는 손짓이 먼저입니다. 그런 루비에게 어느 날 '노래'라는 새로운 세상이 찾아옵니다. 그녀의 숨겨진 재능을 알아본 합창단 선생님(버나도 팔머)을 만나면서 루비는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바라보게 되고, 음악에 대한 진심과 열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루비가 합창 수업을 들으면서 노래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가고, 선생님을 통해 음악 대학 진학이라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되는 과정은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과하거나 신파적이지 않게, 굉장히 자연스럽고 현실감 있게 그려져 있어 더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루비의 불안함과 설렘,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꿈에 대한 갈등의 감정선이 고스란히 전해져 마치 제 일처럼 그녀를 응원하게 됩니다. 자신이 선택해야 할 길 앞에서 고민하는 루비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성장통과 닮아 있어 큰 공감을 얻습니다.
2.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 다른 언어로 소통하다: 침묵 속의 진짜 대화
《코다》는 단순한 성장 영화를 넘어선 '진정한 가족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따뜻한 가족애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서로 너무 사랑하지만, 동시에 너무도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가족 구성원들의 현실적이고 때로는 아픈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보여줍니다. 루비는 가족과 함께 있고 싶지만, 자신만의 세상(소리와 음악의 세계)을 향한 갈망도 동시에 안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꿈을 좇는다는 것은 가족을 '떠나는' 것이자, 어쩌면 그들을 '버리는' 것과 같은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루비의 부모와 오빠는 그녀가 자신들을 세상과 연결해주는 통역사 역할을 해주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루비 없이 일상생활을 상상하기 어려운 가족들은 루비가 음악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꿈을 처음엔 극심하게 반대합니다. 그들의 반대는 단순한 이기심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루비에게 너무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괴감, 그리고 자신들이 루비를 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인 루비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들을 보면서 가족의 사랑이 때로는 너무나 무거운 책임으로 다가올 수 있는 순간들, 그리고 각자가 가진 '침묵 속의 언어'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장벽이 되기도 하는 모습들이 인상 깊었습니다.
특히 영화의 백미로 꼽히는 장면은 루비가 합창단 오디션을 마친 후, 집에 돌아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는 장면입니다. 아버지는 루비의 가슴에 손을 얹고, 그녀의 목소리를 진동으로 느끼며 딸의 노래를 '듣습니다'. 너무도 조용하지만 동시에 모든 감정이 압축되어 들려오는 듯한 이 장면은, 대사가 없어도 서로를 이해하고 연결되는 순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진한 감동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명장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서 가족은 단순히 혈연이 아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다가가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랑의 상징'처럼 느껴졌습니다. 루비의 가족은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결국 그녀가 자신들의 세상(침묵)을 벗어나 더 큰 세계(소리와 음악)로 나아가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게 됩니다. 그런 장면들은 보는 내내 마음 한구석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3. 음악과 침묵 사이에서 피어난 감동: 소통의 진정한 의미를 묻다
《코다》는 음악 영화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음악 영화와는 결이 다릅니다. 노래라는 도구를 통해 루비의 감정을 표현하고, 가족과의 관계를 이어가며, 세상과 소통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화려한 무대와 폭발적인 퍼포먼스를 기대할 수 있는 그런 영화는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조용한 영화입니다. 말보다 손짓(수화)이 많고, 음악보다 침묵이 강렬하게 들려오는 그런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음악이 더 깊고 강렬하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루비가 음악 대학 오디션에서 청각장애인 가족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감동의 절정이었습니다. 이 장면에서는 실제로 사운드를 없애고 침묵 속에 관객을 두어, 관객도 마치 루비의 가족처럼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만듭니다. 그 순간의 정적은 단지 소리를 없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루비의 노래와 감정이 가장 깊은 울림을 전달하기 위한 의도적인 침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음악이 가진 힘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침묵이 얼마나 큰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지도 보여줍니다.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가족이지만, 그들은 몸짓과 표정, 눈빛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슬픔과 기쁨을 나누고, 서로를 감싸 안습니다. 그 과정이 말보다 더 진하게 전해지기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소통'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영화는 결국 ‘듣는 것’이 단지 귀로만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마음으로 듣는 것, 온몸으로 느끼는 것, 상대방의 아픔과 기쁨을 온전히 이해하려는 노력이 진정한 소통이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루비가 자신의 꿈을 선택하면서 가족의 품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저에게 많은 생각을 남깁니다. 부모님과의 이별, 오빠와의 눈빛 교환, 그리고 노래를 향한 그녀의 진심은 마지막까지 잔잔하고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코다》는 겉보기엔 단순하고 조용한 영화일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감정과 메시지가 켜켜이 담겨 있습니다. 가족과의 관계, 꿈을 향한 도전, 소통의 본질, 음악과 침묵의 대비. 이 영화는 우리 모두가 어느 순간 한 번쯤 고민하게 되는 것들을 정직하고 따뜻하게 풀어냅니다. 누군가에게는 '청각장애인 가족'이라는 루비의 현실이 매우 구체적인 이야기일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꿈을 향한 도전, 혹은 가족과의 소통 문제를 고민하는 보편적인 위로가 될 수 있는 영화입니다.
저는 《코다》를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으며, 아마 이 감정은 시간이 지나도 오랫동안 제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조용한 이야기 속에서 가장 큰 울림을 전달하는 이 영화를 진심으로 추천드립니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소통은 듣는 것을 넘어 이해하는 것'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다름 속에서도 사랑과 연대의 힘으로 서로를 연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잃어버린 감수성을 깨우고 싶은 분들께 이 영화가 따뜻한 선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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