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현대 정치사의 주요 사건들 :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

by 소소한쎈언니 2025. 6. 23.

대한민국의 현대 정치사는 수많은 갈등과 도전, 그리고 국민의 뜨거운 열망으로 점철된 여정이었습니다. 군사 정권의 탄압 속에서도 자유와 정의를 외친 국민의 목소리는 정치 체제를 바꾸는 강력한 힘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활발한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 전환점이 된 주요 정치 사건들을 중심으로 한국 현대 정치사의 흐름을 되짚어봅니다.

한국사,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

4.19 혁명: 시민의 힘이 만든 첫 민주주의의 물결

1960년 4월, 이승만 정권의 노골적인 부정 선거는 국민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3.15 부정선거로 인해 마산에서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고, 시위 과정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르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이 사건은 전국적인 항의 시위로 확산되었고, 학생과 시민들은 독재 정권에 항거하며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4월 19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시위대는 “독재 타도, 민주 수호”를 외치며 정권 퇴진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이미 들끓는 민심을 막을 수 없었고,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선언하게 됩니다. 4.19 혁명은 단순한 시위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대한민국 역사상 국민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첫 번째 민주주의 운동으로 기록됩니다. 비록 이후 등장한 정권들 역시 완전한 민주주의를 구현하지는 못했지만, 이 혁명은 국민 주권 의식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의 1979년 부마항쟁,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 등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출발점이자 상징적인 이정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4.19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자유와 정의, 그리고 참된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내는 원동력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실을 향한 피의 항거

1980년 5월, 박정희 사망 이후의 정치적 공백을 틈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사 쿠데타를 감행하며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제한적 계엄령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정치 활동은 전면 금지되며 대학들은 휴교 조치에 들어갔습니다. 이에 반발한 학생들과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회복과 군부의 퇴진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광주 역시 예외는 아니었으며, 전남대학교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자 시민들도 연대하며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시민들의 평화적인 요구를 무력으로 억누르기 시작했고, 계엄군은 실탄과 곤봉, 장갑차 등을 동원해 광주를 사실상 전쟁터로 만들었습니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벌어진 진압 작전은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과 학살로 이어졌으며, 수백 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고 수많은 부상자와 실종자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언론 통제를 통해 광주를 ‘폭도들의 반란’으로 왜곡했지만,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며 진상 조사가 이루어졌고, 이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단순한 지역적 사건을 넘어, 국가 권력의 폭압에 맞서 국민이 어떤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정의와 자유를 지키려 했던 상징적인 저항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사건은 민주주의의 본질과 인권의 가치, 국가 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되새기게 하는 중요한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 있으며, 매년 5월이 되면 전국 곳곳에서 추모와 기억의 행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광주의 희생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결코 잊혀서는 안 될 숭고한 자산입니다.

6월 민주항쟁과 직선제 개헌: 국민이 이긴 역사

1987년,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은 다시 한 번 거대한 분수령을 맞이하게 됩니다.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수사 도중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군사정권의 폭력성과 비인간적인 통치 방식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처음엔 정부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변명으로 사건을 축소하려 했지만, 진실은 숨길 수 없었고 국민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습니다. 이런 가운데 전두환 정권은 후계자로 노태우를 지명하며 간접 선거 방식의 대통령제를 고수하겠다고 발표했고, 이는 국민의 인내심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7년 6월 10일을 기점으로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인 민주화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른바 6월 항쟁은 단순한 학생운동을 넘어, 노동자, 종교인, 시민단체, 일반 시민들까지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대규모 저항 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시위의 핵심 요구는 대통령 직선제 도입과 군사독재 종식이었으며, 서울뿐 아니라 전국 주요 도시 곳곳에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호헌 철폐”, “독재 타도”, “민주 헌정 회복”을 외치며 행진을 이어갔습니다. 경찰과의 격렬한 충돌 속에서도 시민들은 끝까지 비폭력을 유지하며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주장했고, 시위는 점점 더 커져 국제 사회의 주목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6월 29일, 노태우는 전격적으로 ‘대통령 직선제 도입’, ‘언론 자유 보장’, ‘국민 기본권 확대’ 등을 담은 6·29 선언을 발표하며 국민의 요구를 수용합니다. 이 선언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고, 이듬해인 1988년 첫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면서 한국은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인 국민 주권 시대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후 정치의 다원화가 진전되고, 시민사회가 폭넓게 성장하는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권리 역시 이전보다 대폭 확대되었습니다. 이처럼 6월 항쟁은 단순한 거리 시위를 넘어, 국민이 스스로 권리를 되찾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만든 위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