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조선인에게 내려진 창씨개명은 단순히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행위를 넘어, 민족 전체의 정체성을 뿌리째 뒤흔들고 문화적 동화를 강요했던 식민 통치 전략의 가장 잔혹한 일환이었습니다. '이름'은 한 사람의 정체성이자 역사를 담는 그릇이며, 한 가문의 뿌리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은 이러한 이름의 본질을 강제로 왜곡하고 일본식으로 바꾸게 함으로써 조선인을 '일본인처럼'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일제가 창씨개명을 어떻게 호적제도에 기초하여 행정적으로 구조화했으며, 교묘한 관료 시스템을 통해 어떻게 강요했는지, 그리고 이에 대한 민중의 굴하지 않는 반응과 저항은 어떠했는지를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합니다. 또한 오늘날 이 제도가 한국 사회에 남긴 역사적 교훈과 시사점을 함께 고민하며,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정체성의 가치에 대해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1. 호적제도를 통한 정교한 통제 시스템: 이름의 말살과 민족성 강탈
일본이 1910년 조선을 식민지로 강점한 이후 가장 먼저 손을 댄 것 중 하나는 바로 조선 사회의 근간이 되는 '행정 시스템'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서구 열강의 근대적 국가 통제 방식을 모방한 '호적제도'가 있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 「민적령」을 제정하며 조선의 인구와 가계를 체계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일본식 호적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이는 조선의 전통적인 족보나 가족 단위 중심의 사회 질서와는 완전히 다른, 국가가 개인을 직접 관리하고 통제하는 근대적 방식이었습니다. 과거의 조선에서는 '성'과 '본관'을 통해 가문의 역사를 이어나갔고, 개인의 존재는 가문과 종친회의 강력한 연결고리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도입한 호적제도는 개인 단위를 중심으로 한 서류상의 정체성을 부여했으며, 이는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고 식별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모든 개인은 호적에 등록되고 관리되어야만 국가로부터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1939년, 조선총독부는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 민사령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이듬해인 1940년 2월 11일(일본 건국절인 기원절)부터 ‘창씨개명’을 본격적으로 시행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창씨’는 일본식 성씨인 '씨'를 새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며, ‘개명’은 기존의 이름을 일본식 이름으로 고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작업은 단순히 성과 이름을 바꾸는 것을 넘어, 법적으로도 조선인을 ‘일본인’처럼 보이게 만드는 제도적 장치였습니다. 조선인의 기존 성씨는 일본식 발음으로 조정되거나(예: 김 → 가네야마, 이 → 리마) 아예 사라지도록 강요되었고, 이름 역시 일본 고유의 작명법을 따르게 하여 조선인의 정체성이 서류상에서 완전히 삭제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씨는 조선인의 성과는 달리 '성'의 개념을 벗어나 직업이나 거주지를 나타내는 일본 특유의 성씨 문화에서 파생된 것이었기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혈연 공동체의 의미를 지닌 조선인의 성과는 본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이 호적 시스템은 단순한 이름 기록을 넘어, 취업, 교육, 병역(징용/징병), 세금 징수, 재산권 행사, 토지 소유, 심지어 거주지 이동의 자유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적 활동과 밀접하게 연계된 정보의 통제 시스템이었습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지는 구조를 만들어, 사실상 조선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제도는 조선인을 일본화하기 위한 강력한 통치 기술이자, 조선인의 민족성을 말살하려는 치밀한 식민 통치의 핵심 도구였습니다. 행정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과 정체성을 억압하는 폭력적인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이름이 개인의 역사를 담는 가장 기본 단위임을 고려할 때, 창씨개명은 조선 민족의 역사 자체를 일본 제국주의에 종속시키려 한 가장 악랄한 시도였습니다.
2. 관료 시스템을 통한 교묘한 시행과 강압적인 압력: '자율'을 가장한 강제
일제가 창씨개명을 시행하면서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수단은 바로 치밀하고 광범위한 ‘관료 시스템’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상부의 지침을 시작으로 각 지역의 도청, 군청, 면사무소에 이르기까지 하급 행정관료들을 통해 창씨개명을 조직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추진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1940년 2월부터 8월까지 시한을 정하고 ‘자율 신청제’라는 명목을 내세웠습니다. 이는 국제사회에 대한 비판을 피하고 일제의 '문화 통치'라는 허울을 유지하기 위한 면피 수단이었을 뿐, 실상은 ‘자율을 가장한 강제’였습니다. 신청 기간 종료 후에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가정은 관공서 출입 금지, 생필품 배급 제외, 공공 서비스 이용 제한 등 심각한 생활상의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하급 행정관들은 총독부로부터 실적 압박을 받으며 목표 달성을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마을 이장, 동장, 면장, 순사(경찰), 우편 집배원, 심지어 교사, 의사, 종교 지도자, 부녀회장까지 동원되어 조선인에게 창씨개명을 권유하거나 협박에 가까운 강요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자녀가 학교에 갈 수 없다', '학교 진학에 불이익이 있다',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승진이 어렵다', '군복무(징용/징병)에 끌려갈 수 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불편해지고 고립된다'는 등의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위협과 사회적 압력이 광범위하게 작용했습니다. 특히 생계가 어려운 민중에게는 식량 배급, 생필품 구매, 공공 근로 참여 등을 창씨개명과 연계하여 압박하는 등 그야말로 삶의 구석구석을 옥죄는 방식이 사용되었습니다.
행정적으로는 신청서 양식을 미리 인쇄하고, 지역 담당자가 직접 마을을 돌며 서류 작성을 돕는 등 모든 절차가 조직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또, 학교에서는 창씨개명률을 교사의 인사고과에 반영하거나,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학생에게 따돌림, 체벌, 성적 불이익을 주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심지어 학교 측에서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면 출석을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어, 자녀의 교육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선택한 부모들이 많았습니다. 군대와 기업에서는 창씨개명 여부를 진급, 보직, 채용 조건으로 삼아 엘리트층과 지식인들에게도 강요했습니다. 이렇듯 관료 시스템을 통한 창씨개명 강요는 단순한 법적 강제를 넘어, 조선 사회 전반에 걸친 '사회적 강제'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이는 일제가 조선인의 정신과 문화까지 통제하려 했던 치밀한 식민주의적 폭력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들은 조선인의 자율적인 선택이라는 허울 뒤에 전방위적인 압력과 통제를 숨겼습니다.
3. 민중의 반응과 고통스러운 저항의 방식: 이름을 지키려는 몸부림
일제는 창씨개명을 '조선인이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심을 보이는 증거'로 선전했지만, 조선 민중은 이를 '이름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민족 정체성과 뿌리를 말살당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조선인에게 성씨는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가문의 역사이자 민족의 뿌리이며, 자존심의 근원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민중의 가슴에는 깊은 상처와 분노가 자리 잡았고, 다양한 방식의 저항이 암암리에, 때로는 공개적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이고 광범위한 저항 방식은 ‘거부’였습니다. 수많은 조선인이 창씨개명 마감 시한이 지났음에도 끝까지 일본식 성씨와 이름을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호적상으로는 총독부가 임의로 부여한 일본식 이름이 기록되거나 아예 이름이 없는 상태가 되었을지라도,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자신의 한글 이름과 원래의 성씨를 사용하며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심지어 이름을 바꾸고도 집안에서는 본래 이름을 부르며 일본식 이름을 부끄러워하는 집들도 많았습니다. 종교계는 이러한 저항의 선봉에 섰습니다. 특히 기독교, 불교, 천도교 등 주요 종교 단체에서는 교단 차원에서 창씨개명을 반대하고 신도들에게 일본식 이름을 쓰지 말 것을 권유했습니다. 기독교 교회에서는 이름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의 이름을 지키는 것’과 같다고 가르쳤고, 불교계에서는 조선인의 고유 이름이 수행자의 정체성이라 주장하며 신념에 기반한 단호한 거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종교인과 신도들이 일제의 탄압을 받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창씨개명을 일제의 대표적인 민족 말살 정책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지키는 것을 곧 ‘항일 정신의 실천’이자 '민족혼 수호'로 여겼습니다.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은 창씨개명을 한 독립운동가들에게 본래 이름을 쓰도록 지시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창씨개명을 강요받았음에도 끝까지 본명을 고집하고, 자신의 시에 본명을 새겨 넣으며 저항했던 일화는 오늘날까지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민족적 자긍심의 상징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처럼 창씨개명 거부는 단순한 행정적 저항을 넘어, 식민지 지배에 대한 문화적, 정신적 불복종을 의미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저항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인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선택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자녀가 학교에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군대(징용/징병)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혹은 사회생활에서 심각한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고뇌 끝에 일본식 이름을 택한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이들의 선택은 개인의 의지가 아닌, 강압적인 식민지 현실이 강요한 비극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이들은 해방 이후 대부분 본래 이름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으며, 창씨개명 기록을 말소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일제 총독부는 창씨개명률이 80%를 넘었다고 선전했지만, 이는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생존을 위해 강요된 선택을 했음을 보여줄 뿐, 결코 일본 동화 정책에 대한 자발적 동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민중의 저항은 겉으로 드러나는 직접적인 투쟁이 아닐지라도, 일상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권리를 지키기 위한 소리 없는 몸부림이자,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는 강한 민족의식의 발현이었습니다. 창씨개명은 조선인의 언어, 이름, 감정, 역사까지 지배하려 한 일제의 극단적인 식민 통치 전략이었지만, 이름과 민족혼을 지키고자 했던 민중의 숭고한 저항은 그 전략에 대한 가장 강력한 부정이자, 민족 불굴의 정신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오늘날 창씨개명이 남긴 역사적 교훈과 시사점: 이름, 정체성, 그리고 우리의 책임
창씨개명은 일제가 조선인을 일본 국민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고안한 가장 치밀하고 강력한 민족 말살 정책이자 문화적 폭력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행정 조치가 아닌, 조선인의 뿌리와 문화를 지우려는 철저한 동화정책이었으며,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인 '이름'마저 서류 한 장으로 조작하려 한 비극적인 폭력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시대를 단순한 역사적 사실로만 볼 수 없습니다. 창씨개명은 현재 우리 사회에 여전히 중요한 역사적 교훈과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정체성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줍니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한 개인이 세상과 맺는 가장 첫 번째 사회적 약속이자, 존재의 증명입니다. 자신의 이름과 성씨를 지킨다는 것은 곧 조상의 역사와 개인의 존엄성을 지키는 행위였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문화적 정체성이 위협받거나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과 차별로 인해 정체성을 숨겨야 하는 순간들이 존재합니다. 창씨개명의 역사는 우리가 개인과 공동체의 정체성을 얼마나 소중히 지켜나가야 하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둘째, '권력의 남용과 인권 침해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합니다. 당시 일제는 법적 제도와 관료 시스템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겉으로는 '자율'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강제'였던 창씨개명은, 권력이 어떻게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줍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형태의 권력 남용과 불평등에 대해 우리가 끊임없이 비판적 사고와 저항의 의지를 가져야 함을 시사합니다.
셋째, '역사 인식의 중요성'입니다. 창씨개명을 통해 지워졌던 그 수많은 이름들 속에는 조선인의 눈물과 저항,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정신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여러분도 오늘날 우리가 부를 수 있는 이름 하나하나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 선조들의 피와 땀으로 지켜낸 소중한 유산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과거를 직시하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가지는 것은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 현재와 미래를 살아갈 우리 자신과 다음 세대를 위한 최소한의 책임이자 시대정신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잊지 않을 때, 비로소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으며, 더욱 성숙한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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