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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창씨개명 제도의 구조 - 호적제도, 관료통제, 민중반응

by 소소한쎈언니 2025. 8. 5.

일제강점기 조선인에게 내려진 창씨개명은 단순한 이름 변경을 넘어, 민족 전체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식민 통치 전략의 일환이었습니다. 이름은 한 사람의 역사이자 가문의 뿌리를 나타내는 상징이지만, 일본 제국은 이를 강제로 없애고 일본식으로 바꾸게 함으로써 조선인을 '일본인처럼'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창씨개명이 어떻게 호적제도에 기초하여 행정적으로 구조화되었는지, 관료 시스템을 통해 어떻게 강요되었는지, 그리고 이에 대한 민중의 반응과 저항은 어땠는지를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또한 오늘날 이 제도가 한국 사회에 남긴 역사적 교훈과 시사점을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

일제 창씨개명 제도의 구조 - 호적제도, 관료통제, 민중반응
일제 창씨개명 제도의 구조 - 호적제도, 관료통제, 민중반응

호적제도를 통한 통제 시스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이후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행정 시스템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호적제도'가 있었습니다. 일본은 1910년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곧바로 조선의 인구와 가계를 통제하기 위한 일본식 호적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이는 조선의 전통적인 족보나 가족 중심의 신분제와는 완전히 다른 시스템이었습니다. 개인 단위로 분리된 서류상 정체성은,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고 식별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1939년,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이라는 이름으로 이 호적제도를 적극 활용하기 시작합니다. ‘창씨’는 성씨를 일본식으로 바꾸는 것이고, ‘개명’은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작업은 단순히 이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도 ‘일본인’처럼 보이게 만드는 제도였습니다. 조선인의 기존 성씨는 일본식 발음으로 조정되거나 아예 삭제되었고, 이름 역시 일본 고유의 작명법을 따르게 되어 조선인의 정체성이 서류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호적은 단순한 이름 기록이 아니라, 취업, 교육, 병역, 세금, 이동 등 모든 사회적 활동에 연계된 정보 시스템이었기에,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지는 구조였습니다. 따라서 조선인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이 제도는 조선인을 일본화하기 위한 통치 기술로서 강력한 역할을 했습니다. 행정은 중립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억압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관료 시스템을 통한 시행과 압력

일제가 창씨개명을 시행하면서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수단은 바로 ‘관료’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각 지역의 도청, 군청, 면사무소에 지침을 내리고, 하급 행정관료들을 통해 창씨개명을 조직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자율 신청제’라는 명목 하에 도입되었지만, 실상은 ‘자율을 가장한 강제’였습니다.

행정관들은 실적 압박을 받으며 마을 단위로 창씨개명을 권유하고, 거부 시 불이익을 암묵적으로 암시했습니다. 당시 많은 지역에서는 공무원, 경찰, 교사, 심지어 종교 지도자까지 동원되어 조선인에게 이름을 바꾸도록 설득하거나 협박에 가까운 강요를 하기도 했습니다. ‘개명하지 않으면 자녀의 진학에 불이익이 있다’, ‘직장 승진이 어렵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불편해진다’는 등의 사회적 압력도 작용했습니다.

행정적으로는 창씨개명 신청서 양식을 미리 배포하고, 동장과 면장이 직접 마을을 돌며 서류 작성을 도왔습니다. 또, 공공기관이나 기업에서는 창씨개명 여부를 인사평가 기준에 반영하거나 채용 조건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겉으로 보기엔 법적 강제가 없다는 점에서 국제사회에 대한 면피 수단이 되었지만, 실제 조선 사회 내에서는 거의 강제에 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또한 교사나 학생들 사이에서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경우 따돌림이나 체벌, 성적 불이익을 받는 일이 빈번했으며, 학교 측에서도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면 출석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교육현장에서부터 이름을 통한 동화정책이 실현된 셈입니다.

민중의 반응과 저항의 방식

조선 민중은 창씨개명을 ‘이름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말살당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성씨는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가문의 역사이자 민족의 뿌리였습니다. 이에 따라 다양한 방식의 저항이 등장했습니다.

대표적인 저항 방식은 ‘거부’였습니다. 일부 조선인은 창씨개명을 끝까지 신청하지 않았고, 호적상으로는 이름이 바뀌었더라도 일상에서는 여전히 한글 이름을 사용하며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특히 기독교, 불교, 천도교 등 종교계에서는 집단적으로 창씨개명을 거부하거나, 신도들에게 일본식 이름을 쓰지 말 것을 권유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이름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지키는 것’과 같다고 여겼고, 불교계에서는 조선인의 고유 이름이 수행자의 정체성이라 주장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창씨개명을 민족 말살의 전형이라 보았고, 자신들의 이름을 지키는 것을 곧 ‘항일정신의 실천’으로 여겼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경우도 창씨개명을 강요받았지만, 끝까지 본명을 유지하려 했던 일화는 오늘날까지 회자됩니다. 반면, 현실적인 이유로 개명을 선택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녀의 교육을 위해, 군복무를 피하기 위해 일본식 이름을 택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다수는 다시 본래 이름을 되찾으려 했고, 창씨개명 기록을 말소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를 감안할 때, 민중의 이러한 저항은 단순한 반발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권리를 지키기 위한 조용한 혁명이었습니다. 창씨개명은 조선인의 언어, 이름, 감정까지 지배하려 한 일제의 전략이었지만, 이름을 지키고자 했던 민중의 저항은 그 전략에 대한 가장 강력한 부정이자, 민족혼의 발현이었습니다.

 

창씨개명은 일제가 조선인을 일본 국민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고안한 강력한 제도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행정 조치가 아닌, 조선인의 뿌리와 문화를 지우려는 동화정책이자, 인간의 정체성을 서류 한 장으로 조작하려 한 폭력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시대를 단순한 역사로만 볼 수 없습니다. 현재에도 여전히 정체성과 이름, 민족성과 문화가 위협받는 순간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한 개인이 세상과 맺는 가장 첫 번째 사회적 약속이자, 존재의 증명입니다. 창씨개명을 통해 지워졌던 그 수많은 이름들 속에는 조선인의 눈물과 저항, 그리고 희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여러분도 오늘날 우리가 부를 수 있는 이름 하나하나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 지켜낸 것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올바른 역사 인식은 현재를 위한 최소한의 책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