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는 독재 권력에 맞서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뜨거운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1987년 ‘6월 항쟁’은 한국 민주화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유신 체제 이후의 억압과 저항, 6월 항쟁의 직접적 계기와 전개, 그리고 민주주의 제도화 과정과 그 역사적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목차
- 1. 유신 체제 이후의 억압과 저항 (1972~1986)
- 2. 6월 항쟁의 직접적 계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3. 6월 항쟁의 전개와 국민의 저항 (1987년 6월)
- 4. 6·29 선언과 민주주의의 제도화
- 5. 역사적 의미와 현재적 교훈
1. 유신 체제 이후의 억압과 저항 (1972~1986)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을 선언하며 헌법을 전면 개정하였습니다. 이 개헌으로 대통령에게 무제한 연임 권한이 주어졌고, 국회의 권한은 대폭 축소되는 등 사실상 독재 체제가 공고히 되었습니다. 유신 헌법 아래에서는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심각하게 제한되었고, 정부에 반대하는 모든 정치 세력과 시민 사회는 긴급조치, 국가보안법, 반공법 등의 법률을 동원한 체계적인 탄압에 직면했습니다.
특히 긴급조치 9호는 국민의 정치활동을 사실상 금지시켰으며, 이에 따라 수많은 학생, 노동자, 종교인, 지식인들이 투옥되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당시 유신 체제의 탄압은 개인의 기본권을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켰지만, 이러한 억압 속에서도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결코 꺾이지 않았습니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후에도 군부 세력은 권력을 유지하며 더욱 강경한 통치를 이어갔습니다. 1980년 5월에는 광주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신군부의 권력 장악에 반대하며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신군부는 무자비한 무력 진압으로 수백 명의 희생자를 냈고, 이 사건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되었으며, 전국적으로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열망이 더욱 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이 되면서 대학생, 노동계, 종교계, 야당은 더욱 조직적으로 연대하여 민주화 운동을 벌였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이에 대해 강경 진압과 탄압으로 맞섰지만,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점점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2. 6월 항쟁의 직접적 계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 씨가 치안본부 대공수사관의 가혹한 고문 끝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이를 은폐하려 했고,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얼토당토않은 해명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곧 언론과 시민사회에 폭로되면서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박종철 사건은 한국 사회에 깊은 충격을 주었으며, 독재 정권의 폭력성과 부패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국의 대학과 시민사회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더욱 강력한 민주화 요구에 나섰고, 박종철 열사는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추앙받게 되었습니다.
3. 6월 항쟁의 전개와 국민의 저항 (1987년 6월)
1987년 4월 13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호헌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도입 요구를 거부하며 현행 간선제 체제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학생들, 야당, 재야 단체들은 즉시 강력히 반발하며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6월 10일, 노태우가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된 날, 전국 37개 도시에서 동시에 ‘6·10 국민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시위에는 학생뿐 아니라 주부, 직장인, 종교인, 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이 참여했으며, 명동성당 농성은 경찰의 강제 해산 시도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거리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6월 26일에는 서울 도심과 전국 각지에서 약 100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이는 한국 현대사상 최대 규모의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기록되었으며, ‘군사 독재 퇴진’, ‘직선제 개헌’이라는 구호가 전국에 울려 퍼졌습니다. 시민들은 비폭력적이었으나 단호하게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습니다.
4. 6·29 선언과 민주주의의 제도화
시민들의 거센 저항과 전국적 시위 압력에 직면한 전두환 정권과 민주정의당은 결국 굴복했습니다. 1987년 6월 29일,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는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 언론 자유 보장, 양심수 석방, 지방자치제 실시 등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선언은 형식적으로는 정권 주도였지만, 사실상 시민들의 조직된 힘과 국민적 열망이 만들어 낸 ‘하향식 민주화’의 상징이었습니다. 곧이어 헌법이 개정되었고, 1987년 말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직선제로 진행되어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민주주의 시대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5. 역사적 의미와 현재적 교훈
6월 항쟁은 단순한 정치 체제의 변화를 넘어 시민 사회가 독재를 무너뜨리고 헌법 질서를 되찾은 역사적 경험입니다. 특히 자발적이고 비폭력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은 전 세계에서도 매우 드문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이 운동의 정신은 이후 2008년 촛불 집회와 2016~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 시위에도 이어져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민주주의는 한번 완성되는 체제가 아니며, 시민의 참여와 감시, 책임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역사는 우리에게 명확히 가르쳐줍니다.
참고자료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료집 (http://www.kdemo.or.kr)
- 『한국 현대사』, 서중석, 역사비평사
- 『6월 민주항쟁과 한국사회』, 강준만 외, 인물과사상사